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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는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편지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던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믿음의 비밀을 알게 하셨고, 그 은혜를 누리게 했습니다. 본문은 그런 은혜를 누리고 있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은 이전과 이후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줌으로 그들의 믿음을 한층 더 깊이 있도록 도전합니다.


믿음 이전과 이후

본문 12절과 13절은 믿음 이전과 이후를 이렇게 구분하여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 하였으나 (그러나) 이제는 ~ 하였다.” 성경은 이 구별을 아주 뚜렷하고, 분명하게 긋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 새신자반을 할 땐 반드시 구원 간증문을 쓰도록 합니다. 구원 간증문은 보통 세 단계로 쓰도록 하는데, 첫째는 예수를 믿기 이전의 상태, 둘째는 예수를 믿게 된 동기, 그리고 셋째는 예수를 믿은 후의 변화에 대해 쓰도록 합니다.

성경은 이런 변화에 대해 많이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디모데전서 1장 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뚜렷한 부정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이 어렵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도 착하게, 선하게 살던 사람들, 그리고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예수를 믿은 후에 뚜렷한 변화가 없어서 간증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믿기 전에도 괜찮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은 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했습니다.
잘못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가 스데반이 죽을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상황에서 그는 애국적인 마음으로 했고,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은 후 그의 관점이 변한 것입니다. 바뀐 관점으로 보니 전에 행한 모든 일들이 악한 것이었고, 나쁜 것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부정은 단순히 과거의 악한 생활 때문에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꼭 과거의 나쁜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믿은 후에 발견한 새로운 진리, 새로운 세계관으로 인해 갖게 된 과거의 자기 부정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나옵니다. 하인들이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신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가지고 갔을 때 연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고, 나중에는 낮은 포도주를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연회장의 말은 가나 혼인 잔치집의 주인이 처음에 낮은 포도주를 내어 놓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처음 내 놓은 포도주는 그 집에 있던 것들 중 최상급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로 만드신 포도주를 맛보면서 이전에 내어놓았던 처음 포도주가 부정된 것입니다. 마치 처음 포도주가 맛 없는 낮은 것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개입하신 사건으로 인해 전의 것이 부정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선하게 살았더라도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차원에서 과거의 삶을 부정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12절과 13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너희가 ~ 했으나, 그러나 이제는 ~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서 현재로 뚜렷한 변화를 가지고 넘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뭐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다든가 혹은 전 뭐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간증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아마도 종교개혁 시대의 이야기까지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주제로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당신이 무엇을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혹은 ‘네가 잘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시대가 흐르면서 변질되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돼,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더’라는 식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고 세례 받고 직분도 받고 그냥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된다는 식입니다. 여기서 빠진 중요한 점은 성장에 대한 간절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기는 열심히 먹고 운동하고 배움으로 성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점차 성인으로 스스로 사람노릇을 할 수 있을 때가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처럼 “그 때에 너희는 ~ 했으나, 그러나 이제는 ~ 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렇게 긴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중간에 막힌 담

오늘 본문은 성도와 교회가 어떻게 자라가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를 보여줍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에 ‘중간에 막힌 담’은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표현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제사장의 뜰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식을 행하거나 짐승을 잡는 곳이었습니다. 그 밑에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아래는 여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여기는 이스라엘의 여자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아래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는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약 세 규빗, 지금 우리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135cm 정도 되는 높이의 담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높이라면 성인들은 대부분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이 담을 넘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 의하면 이 담벼락에 이방인이 이 담을 넘어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글귀가 로마어와 헬라어로 쓰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그리고 1871년 실제로 당시 이 담벼락에 붙어 있던 금령을 새긴 명판 중 하나가 발굴되었습니다. 그 명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어느 다른 나라의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성전을 둘러싼 이 다장과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누구든지 들어가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규정과 관련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7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되어서 아주 심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바울 자신도 그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에루살렘에 가서 며칠 있지도 않아서 정말 체포되었습니다. 그 때 체포된 죄명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이방인 드로비모라는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누명을 씌워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은 잡혀갔고, 여러 번의 심문을 받고 결국 로마로 압송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주후 약 58년경이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쓴 때는 주후 61-62년 경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중간에 막힌 담’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도저히 넘어설 없는 경계선이었습니다. 하나될 수 없고, 섞일 수 없는 담입니다. 물론 이 담은 단지 물리적인 담만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이 담으로 상징되는 많은 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매우 멸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담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십자가로 허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때는 역사적으로 주후 29년이었습니다.

이 담이 언제 무너졌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주후 70년이었습니다. 로마의 장군 Titus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며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굶어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전멸시킨 아주 무시무시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만큼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비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았던 벽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즉 에베소서는 이 담이 주후 29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허셨다고 말씀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담이 무너진 것은 주후 70년에 무너짐으로 이 두 사이에 약 40년의 간격이 생깁니다. 주후 70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계속해서 성전 제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의 성전 제사 참여는 금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한참 후에서야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실제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이 담이 무너지는 과정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속한 이방인들에게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환상을 통해 베드로를 설득하시고 그를 보내셔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11장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의 명령을 따라 그렇게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왔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몇명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초지종 성령께서 행하신 일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주셨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이 일 후에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후 49년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또 한 번 소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좋은데, 그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을 먼저 지키게 하여서 유대인이 된 후에서야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로 인해 긴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후 58년에 드로비모 사건이 있었고, 주후 62년에 에베소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이 역사가 십자가의 역사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적용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성도와 교회가 어떻게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때’와 ‘이제’가 확연하고 뚜렷하고 구분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삶이 꼭 악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과거보다는 예수를 만난 이후의 삶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구분되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부정하게 되고, 더 나은 포도주를 맛본 후에서야 처음 포도주를 부정할 수 있으며, 보화를 발견한 후에서야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재물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변화를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첫째 성도는 개인적으로 믿음이 지속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성장의 끝은 어디입니까? 성장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문제는 성장이 멈추는 것입니다. 신체적으로는 성장이 멈췄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 성장이 멈췄다는 것은 곧 부패하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제자훈련 2-3학기 했다고 다 깨달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10-20년 다녔다고 다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학문도 한 분야를 깊이 알기 위해 평생 연구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하물며 어떻게 믿음의 세계를 그렇게 간단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세계가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되고 알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까? 겨우 그 정도의 세계를 위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그런 생각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게 합니다. 신앙생활이 쉽게 지루해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며, 그냥 해 오던 일이기 때문에 안할 수 없는 신앙행위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그렇게 짧게 알아갈 수 있는 단순하고 낮은 수준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돼’라는 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는 한 없이 깊은 주님의 은혜 안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세상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누리고 경험할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놀라운 영적 체험과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두 번째, 개인의 신앙은 반드시 공동체의 믿음 성장과 함께 가야 합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믿음이 자라간다면 내 가정도, 교회도, 구역도, 직장도 같이 자라가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은 성장하는데 공동체의 믿음은 답보 상태로 머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의 베드로의 고넬료 전도는 필연적으로 11장의 사건, 즉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공동체가 마음을 열고 주님께 순종하는 단계로 이어졌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 성숙한 베드로의 사역, 필연적으로 성령 충만한 교회, 성숙한 교회의 사역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서 바울이 드디어 사도행전 13장에서 이방인 전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흔히 교회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의 영적 성장을 넘어서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필연적으로 먼저 영적 성장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혼자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영적으로 자랐는데, 교회는 안 자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에서 신앙이 좀 있다고 자처하는 분들이 자기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말 이면에는 자신은 믿음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믿음이 자라가지 않는다는 듯한 뉘앙스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논리상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은 필연적으로 11장의 사건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몸입니다. 그의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만약 그들과 오래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내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아주 긴 여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장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적 성장을 우리는 계속해서 이루어가야 하며, 이러한 성장을 사모해야합니다. 우리 개인과 교회를 통해 이런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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