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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Mayflower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드린 예배가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첫 해 겨울을 보내면서 102명 중에 무려 44명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해를 지나고 이듬 해 가을 하나님께서 주신 결실을 주님께 드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감사는 후손에 큰 축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은 단지 또 하나의 미국 명절이 아닙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기원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기억하면서 조상들의 어려웠던 광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은 매년 하반기에 초막절을 지켰습니다(출23:16). 이 때는 늦은 곡식을 거둬들여서 저장하는 날이므로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오늘의 추수감사절은 바로 초막절 혹은 수장절에 해당합니다.

성경에는 감사하라는 말씀을 200여 회 가까이 나옵니다. 감사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믿음을 가름하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감사하지 않는 믿음을 믿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권사님들과 함께 심방하면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성도를 심방하면 위로하기가 참 어려울 수도 있는데, 같이 동행하시는 권사님들은 그들을 잘 위로하곤 했습니다. 팔을 다친 성도를 심방하면 권사님들은 흔히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팔만 다쳤으니 다행이지, 얼마나 감사해. 만약 다리까지 다쳤으면 걷지도 못하고 어떻게 했겠어. 정말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몰라!’ 그러다가 다리까지 다친 성도를 만나면 ‘팔과 다리만 다쳤으니 감사하지. 만약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혼자 속으로 이왕이면 아예 사고가 나지 말도록 막아주셨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해 달라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 이런 엄청난 사고 중에도 이만큼만 다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지켜주실려면 아예 사고가 나지 않게 해 주셨어야지, 아니 이렇게 병원에 가둬놓고 얼마나 힘들게 시간을 보내겠는가?’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권사님들의 감사를 무시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고가 나지 않을 때는 좀처럼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쭤봅시다. 오늘 교회 오시는 동안 사고 안 난 것에 대해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우리는 언제든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사십니까? 우리는 평안할 때는 좀처럼 감사하지 않습니다. 꼭 어려움을 겪거나 사고를 당하게 되면 그 때 그나마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조금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감사에 대해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만큼 아주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3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다시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가 위대한 것은 감사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반응이고, 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주시고,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지금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덕분이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감사는 신앙의 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과 영혼, 가슴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그렇게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1.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5절에서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고, 에베소서 3장 8절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주후 55년에 기록한 것이고, 에베소서는 주후 62년 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는 주후 64년 경에 기록했습니다. 즉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다른 사도들보다 못한 자라고 고백하다가 모든 성도들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고백하고는 마지막에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점점 더 낮은 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는 주님을 알기 전에 엄청난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추종하는 자로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핍박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도록 강요했었습니다.
사도행전 26절 9절과 11절, 갈라디아서 1장 13절, 사도행전 9장 1-4절 등을 보면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강제로 그리스도를 모독하게 하는 말을 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지금으로 말하면 고문 집행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런 기사를 보면서 기억할 것은 그는 그가 행하던 일들을 옳다고 생각했었다는 점입니다.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믿지 아니할 때는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렇게 행하면서 그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행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행한 일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도 보통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내 안에 그렇게 끔찍한 죄와 악함이 들어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니다.


가끔 대학부 졸업한 학생들이 전화를 하기도 하고, 이메일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어느 한 형제가 전화를 해서 ‘목사님~, 사는 게 힘드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더럽나요!”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세상에 나가면 얼마나 더 힘들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세상이 더럽지. 내가 봐도 정말 더러워. 세상만 더럽냐? 아니야! 교회도 엄청나게 더러워. 그런데 한 가지 네가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그것은 바로 너도 더럽다는 거야.” 그 형제의 대답, “그야 물론 그렇지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깨끗하다고 말해도 결국 더러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도 다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여전히 더럽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추악한 생각을 하고 있고, 여전히 지금도 악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깨달은 바울이 하나님을 볼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런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오래 참으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이 되게 하셨다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삶을 본으로 삼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의 예(example)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죄는 하나님의 선함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면서 너무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죄를 깨달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오래 오래 기다리심으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웠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의 죄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우리의 죄를 몰아가는 것은 우리를 죽이려 하심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 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감춰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이어온 악한 습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 긍휼히 여기심과 은혜를 발견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감사를 가져오게 하고, 삶의 놀라운 소망을 가져옵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삶의 완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앞선 부분은 사도 바울이 소극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였다면 이 부분은 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우리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 혹은 사업이나 학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말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우리는 금방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니, 언제 짤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나는 처지가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도 늘 짤릴 위기에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의 사도성을 인정받지 못해서 언제나 그의 사역은 위기 가운데 몰렸습니다.

샬롯츠빌한인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부르신 곳입니까? 교회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은 하나님께서 진지하게 생각하시고 정말 합당하다고 생각하셔서 주신 직분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고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숱한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지만, 그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마다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났고, 교회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충성되게 여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데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우셨고, 자신을 충성되게 여겨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습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만 어떻게 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능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셨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하게 하셨습니다.

즉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삶의 완성을 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면서 그런 자신을 기다리시고 용서하시고 인내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충성되게 여겨주신 것과 능력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가능해진 것들을 보면서 그는 무한히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돌리고 그분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감사가 우리에게 넘쳐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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