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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가아사랴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갔습니다. 백부장 율리오의 책임 하에 시돈을 거쳐 무라시에 들렸다가 배를 갈아타고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는 금식하는 절기(아마도 대속죄일 무렵, 지금으로 10월 초순)가 끝나감으로 바울은 더 이상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여기서 겨울을 난 후 항해할 것을 백부장에게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따라 40마일 정도(하루 정도 걸리는 뱃길) 더 가서 그레데 섬의 가장 큰 항구 도시인 뵈닉스까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루 더 가던 항해 길에 바울 일행은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나 무려 14일 간이나 폭풍에 휩쓸려 고통과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바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교훈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교훈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결정은 언제나 편하고 안전한 길을 보장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인생을 안전하게만 인도하시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정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결박 당할 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말합니다. 백부장의 결정과 바울의 권고를 단순히 그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백부장의 문제는 육신의 편함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그레데 섬의 가장 큰 항구도시, 편안한 숙소와 더불어 여러가지 위락시설이 잘 갖춰진 도시에서 겨울을 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명을 구했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그가 함께 한 종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하면서 ‘“우리”가 산에서 예배한 후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이삭에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삭이 살아있는 채로 다시 모리아 산을 내려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산 채로 다시 데리고 올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의 예배, 그의 제사는 진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삭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라는 사실도 믿었지만, 또한 이삭을 진짜로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것을 결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삭을 향해 칼을 든 것은 진심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리실 것을 믿었지만, 또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살리실 것만 믿는 것은 결코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죽을 것도 각오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 약속을 확신하는 근거는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결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있어서 삶의 결단과 믿음의 행위는 결과가 좋으냐? 나쁘냐? 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느냐? 아니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라는 뜻이죠.


하나님은 본문에서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사명을 재발견하게 하고, 고취시키는 일에 집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힘들 때마다 주님은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행23:11, 27:24)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단순히 마음의 격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담대하라.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어서 그가 가야 할 길,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재발견하게 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바울은 14일 동안이나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리면서 지쳤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그에게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장 11절에서는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본문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가이사 앞에서 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힘을 내고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이 큰 풍랑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붙들고 계셨고,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이 큰 풍랑 속에서 엄청난 힘을 내게 합니다. 바울이 풍랑 속에서 지쳐가고 낙심했던 이유는 육신적인 피로나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친 이유는 사명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할 때 그는 답답했고 낙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아셨던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며 ‘얼마나 힘드냐?’고 하시지 않고, 그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며,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을 지시하셨습니다. 사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 때보다 남을 위해 살 때 더 큰 동기부여를 받고, 더 큰 목적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

어느 집사님께서 담배를 끊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회사에서 돌아왔는데, 딸이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 교육을 받고 나서 아빠에게 간곡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담배를 더 이상 피우시지 말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은 바로 그 시점부터 담배를 더 이상 피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기하게도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놀라운 힘과 절제, 능력을 발휘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사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살게 하셨는지, 왜 나를 부르셨는지를 아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바울에게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으니.” 이제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와 선장, 선주, 군인, 죄수 모두 276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바울에게 리더십을 주셨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 주셨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276명의 사람들 중에는 아픈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지치고 낙심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서로 다투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동승한 바울의 제자(종) 아리스다고, 의사 누가, 이 세 사람은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276명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보고 치료하고 격려하고 화해시키는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바쁜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또한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었겠습니까?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의 가족 8명은 대홍수 중에 구원받은 유일한 가족입니다. 방주를 탄 그들의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방주에 있는 거의 1년 동안 그들은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방주에 함께 타고 있는 크고 작은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돌보는 일들을 바쁘게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힘들고 어렵지만은 안았던 이유는 그들의 자리가 바로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지나칠만큼 아주 극단적으로 개인주의화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개인이 다 파편 조각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만 지나치게 몰입하는 현대인은 결국 자신이 파 놓은 소외라는 무덤에 묻혀서 각가지 정신적 고독과 질병에 시달람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웃을 돌보고, 책임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사명이라는 단어는 사라져버렸습니다. pressure라는 말을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심지어 자녀와 배우자를 위해 수고하는 것조차 부담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쁨으로 부담을 감당하는 성도의 삶이 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렵고 힘든 시대에서 그 힘든 삶의 상황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회복이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죽을 것도 각오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리라고 약속하시기도 하셨지만, 또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시기도 하십니다. 세상의 거센 풍파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은 달콤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사명을 회복시키시고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과 가정과 교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명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던 바울의 삶이 바로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방법입니다. 276명을 섬기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화해시키면서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낙오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안전하게 육지까지 인도하여 구원하는 것, 바로 그 일을 이루었을 때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큰 감사와 감격이 있을까요? 그리고 난 후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앞에 섰을 때, 비록 죄수의 신분으로 죄수의 옷을 입고 그 앞에 섰더라도 그가 얼마나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에게 전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복음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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