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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우리는 성탄절이 될 때마다 그 기쁨을 나눕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왠지 기쁘고, 기대가 되고, 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쁨을 기대합니다. 성탄의 기쁨이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John Piper라는 목사님이 쓴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빠가 집에 들어올 시간이 되면 아이가 아빠를 기다리면서 흥분되어 있습니다. 즉 아이는 아빠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가 들어오시면 아이는 기뻐합니다. 아빠에게 키스를 하고, 올라탑니다. 그렇게 기쁨을 누리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아빠가 오시기 전 아빠를 갈망할 때와 아빠가 들어오셨을 때 느끼는 기쁨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갈망하는 마음은 주님을 보고 누리는 기쁨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므로 갈망이 큰 사람이 기쁨도 큰 법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기쁨과 갈망은 결코 기쁨과 갈망 그 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기쁨과 갈망의 대상은 아빠였습니다. 아빠가 없으면 기쁨도 갈망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누리는 기쁨과 갈망도 그 대상이 기쁨과 갈망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그리스도인이 ‘행복해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거나, 혹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행복 자체가 목적일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행복의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 대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갖는 갈망과 그 분을 만나면서 누리는 기쁨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일은 여러 상황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혹은 내가 다른 사람을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받았을 때 초대한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하지만, 정말 기쁜 이유는 그 분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초대받아 누리는 기쁨은 음식에 있다기보다는 초대한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분으로 인해 기쁜 것입니다. 음식을 다 먹고 음식 맛은 기억하지 못해도 초대한 그 분의 마음은 길이길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 음식 맛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에서 교육부를 담당하신 장로님께서 연말이 교사들과 교역자들을 레스토랑으로 초대했습니다. 연로하신 장로님이신데, 약속된 식당에 가보니 교역자들과 교사들의 이름표를 테이블마다 다 써 붙여놓았습니다. 거기서 내 이름을 볼 때 느끼는 감격은 정말 남달랐습니다. 장로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존중하고 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으로 인해 지금도 감동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갈망하면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탄, 즉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흔히 성육신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성육신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성육신이라는 이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신 후 집에 가셔서 적어도 오늘과 내일 성탄에 관한 본문들을 보면서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내일은 성탄절입니다. 온 교인(아동부/중고등부)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매년 성탄절에는 교육부 목사님이 어른 설교를 하고, 제가 아동부 설교를 했습니다. 어린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힘든 것은 이 말씀을 어떻게 아이들이 이해하는 언어와 개념을 사용해서 전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흔히 설교 중에 가장 어려운 설교가 유치부/유아부 설교입니다. 성경의 본래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이 잘 전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득이 어린이의 시선까지 설교자의 시선을 내려야 합니다. 그들이 보는 식으로 보아야 하고, 그들이 느끼는 식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언어에 익숙해져 있고, 또 얼마만큼의 이해도를 가지고 있느냐를 잘 알아야 합니다. 저도 그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서 한참 뛰어다니고 놀던 때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30년 혹은 35년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서 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따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목사는 30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어려운데, 하나님은 만물의 조물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육신의 과정에서  인간을 우격다짐으로 억압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인간의 세상에 소란하지 않게, 지극히 조용히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와도, 조금만 높은 사람이 와도 시끄럽고 여러 가지 준비로 소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누구도 알지 못하게 오셨습니다.

성경은 미가서 5장 2절에서 메시야가 바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사렛에서 살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택해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고 듣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의 정혼한 남자인 요셉은 그와의 약혼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역시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그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 전역에 걸쳐 호적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인구조사를 하는 것인데, 세금징수와 강제병역동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를 다스릴 때 로마는 매우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전쟁이 없는 오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 호적보고는 매 14년마다 실시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점입니다. 상황으로 봐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날 때 이미 마리아는 건의 만삭이 가까워온 것 같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80마일(120km) 정도 됩니다. 장정으로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삭이 가까워오는 여자 임산부로서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더욱이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갔습니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 사실을 요셉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리아가 만삭이 되어 오고, 요셉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을 따라 호적을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마리아를 볼 때 마리아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리아에게 더 유익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만약 혼자 나사렛에 머물러 있다가 출산을 하게 되면 마리아의 출산에 대한 험담과 그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굳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간 후 그들은 다시 나사렛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낳고 요셉과 마리아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고, 다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난 후 아기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헤롯 왕에 의해 추격을 받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지시를 받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는 기시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헤롯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다시 유대 땅으로 들어와서 나사렛으로 갔습니다. 이 때 아기 예수의 나이는 대략 4살 정도 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이전의 요셉과 마리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입니다. 그로 인해 어린 나이의 예수는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세상의 이목을 받지 않고 조용히 부모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조금도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 분은 마구간에서 태어 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그를 포대기에 싸서 말이 먹는 밥통에 누우신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나오는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는 말은 그의 낮아지심을 의미합니다. 조용히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아주 가까이 오시기 위해 구유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일과 더불어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 목자들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도록 준비하십니다. 목자란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계층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또한 법원에서 증인으로 설 때도 목자들은 증인의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가보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마리아만 아기를 낳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는 것이 다른 여인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목자들이 그냥 찾으러 나섰다면 그들은 아마도 좀 더 으리으리한 집을 찾았을 것입니다. 또한 목자의 신분으로 밖에서 일하다 찾아들어가려면 그것도 쉽지는 않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그날 전후로 태어난 아기가 아기 예수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에 태어난 아기도 있을 수 있고, 어느 부자 집에서 태어난 아기는 며칠이고 아기 출생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기는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누인 아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누구나 볼 수 있게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구유 위에 누우셨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람이 바로 목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 예수로 오심의 사건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엄청난 능력과 기적을 일으키셔야 하지 않느냐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라는 말은 아기 예수의 낮아지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로서의 표적이었습니다.


14절에서 천군천사들이 모여 아기 예수의 출생을 축하하며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당시 로마의 역사에 대해 조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본문에 나오는 대로 가아사 아구스도입니다. 그는 로마의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그 말은 그 이전에 로마는 원로원들이 법을 만들어 그 법에 의해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법이 잘 완성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로마 백성들은 본래 왕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로원을 중심한 귀족들이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결국 서민들은 언제나 착취만 당하고, 군사로 징집되지만 그로 인해 얻는 삶의 유익은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로마 사회 전체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격차로 심한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사람들이 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서 때문에 본래 이름이 옥타비아누스였던 이 사람은 최고사령관이라는 뜻의 ‘임페라토르’라고 불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지금의 황제라는 뜻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 배경으로 로마의 황제가 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를 상당히 잘 다스렸습니다. 그로 인해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40년 이상 그가 다스릴 때의 로마는 거의 전쟁이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에는 평화와 안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훨씬 후에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 보면,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와 안전’은 로마의 통치구호였습니다.로마가 정복하는 도시마다  도시의 가장 중심부에 크게 ‘평화와 안전’이라고 써 붙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은 로마가 진정한 평화를 주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 중 AD 55-135년에 살았던 철학자 Epictetus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는 전쟁으로부터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황제는 백성의 병고와 슬픔, 그리고 욕망으로부터는 평화를 주지 못한다. 황제는 외적인 평화보다 더 간절히 사람들이 소망하는 마음의 평화를 주지 못한다.’ 이 말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참 평안을 얼마나 갈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천군천사들이 아기 예수의 출생을 축하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아기 예수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초라하게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강보에 싸여 구유 위에 뉘였습니다. 참으로 초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초라하게 오셨기에 그 분은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사셨고, 이름 없이 성장하셨습니다.멀리 여행한 적도 없었고, 다만 한 번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재산도 없으셨고, 권력도 없으셨습니다. 정규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셨고, 수련의 경력도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 랍비를 놀라게 하였고, 이적으로 의사를 당혹하게 했으며, 장성해선 자연의 법칙도 지배하셨습니다. 환자들을 의약도 없이 고쳐주셨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처럼 당당하던 가이사 아구스도도 사라졌고, 희랍과 로마의 정치가들과 철학자들도 다 과거의 인물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오늘까지 2000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어린 아기를 모두 죽였던 헤롯도 그를 죽이지 못했고, 무덤조차도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 지극히 높은 하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며, 천사들의 환영과 성도들의 찬양을 받으시며, 마귀들을 굴복시키시고 우리의 구세주로 계십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어린 아기로 오신 그 분은 온 세상의 구주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믿음이라 힘없는 자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그것은 표적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의 구세주라는 표증입니다. 이 표징을 보면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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