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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미국에 유학을 오기 전에 이미 유학 후에 갈 교회를 정해 놓았습니다. 아니 한 교회에서 그를 담임목사님으로 모실 계획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을 보낸 것입니다.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자기가 섬길 교회와 교회가 속한 지역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들을 파악했고, 또 장차 목회할 교회를 위한 준비를 미리부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장래를 보장받아놓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에 매우 안정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유학생활을 조금 못해도 괜찮습니다. 과정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학점이나 장래에 대한 큰 염려를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래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5분 후에 일어날 일만 알고 있어도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의 일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안과 염려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사람처럼 장래 일이 결정되어 있어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에 의해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보장은 사실 진정한 면에서 보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절한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우리 모두를 필요 없이 만드시지 않고 가장 쓸모 있는 자리를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목사님과 같이 그렇게 장래가 약속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든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을 믿고 가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교회나 멋진 직장이 약속해 주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장래의 보장이 됩니다.

황보민 선교사님과 대화하면서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선교사로 평생 사역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보통은 단기 사역을 먼저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중단기(약 1-2년)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 선교사로서의 자질과 은사가 확인되면 6년을 선교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안식년을 가지고, 다시 6년을 연장합니다. 그런데 6년 사역을 마친 후 다시 선교현장으로 가는 확률이 매우 적다고 합니다. 그런데 황보민 선교사님은 이미 13년째 볼리비아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십니다. 물론 선교사 훈련까지 합하면 17년이 됩니다.

그런데 대화중에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시기를 선교사역도 2세까지 내려가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금방 놀라서 그럼 아이들도 선교사로 살게 하시려고요? 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원하면 해야죠’ 선교사님 마음속에 아이들까지도 아예 볼리비아 아요레 부족이 되게 하실 생각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선교사님 마음 안에 제게 없는 뭔가가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꿈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입니다. 그 비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인터넷도 잘 못하시고, 전기도 없는 곳에서 살면서 사역하시지만, 제 안에 없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비전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약속입니다. 오늘 선교사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선교현장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선교사님 안에 있는 그 소망, spirit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며 없는 것을 있게도 하시는 분이라고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랐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언제나 그의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면서 갔습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갔다는 뜻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한 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의란 법정에서 모든 법의 요구들을 다 지켰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얻는 자유와 기쁨, 기회와 능력, 행복을 함께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신비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우리의 인생은 장래가 보장되어 있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운명을, 아니 영생까지도 보장해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가는 것이 우리에게 의를 이루어갑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일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낼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재앙이 내릴 때마다 애굽은 매우 큰 곤경 속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 바로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일로 내가 여호와인 것을 알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만이 세상의 참 신이심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자기 백성들의 삶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성도는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요 즐거움입니다. 나의 현재가 아니라 내일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면서 소망하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드린 목사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 목사님은 이미 그 교회는 어느 정도 경험하고 왔습니다. 자신이 장차 섬길 교회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더라도 교회가 얼마만한 크기인지, 성도들은 어떤 분들인지, 지역은 어떤 지역인지, 그곳에 가면 어떤 사역을 해야 할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지금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더라도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곳을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계획을 세웁니다. 마음이 설렙니다. 그에게 학점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웬만한 어려움은 참아낼 수 있습니다. 학생으로서 겪어야 하는 많은 어려움이 그에게는 그다지 크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후면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를 그렇게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사실 장래일은 불투명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갈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바라보고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장래의 약속이었습니다. 한 교회에서 한 목사님에게 준 약속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약속이었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었고, 나그네 길을 가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3절을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바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가는 사람도 때로는 환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것의 결핍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궁핍과 고독을 경험하고, 슬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한 슬픔을 경험합니다.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뜻하지 않는 재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환난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욥은 10명의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습니다. 한순간에 건강을 잃었습니다. 아내로부터도 구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과 확신이 그를 고난 속에서도 든든히 세웠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숱한 모함과 위험 속에서 나라의 지도자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에게 다가오는 위협과 고난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순간도 이런 상황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즐거워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들을 통해 오히려 선한 일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지금 잠시는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들의 장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마치 조금 전 소개드린 목사님의 장래가 정해져 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장래의 보장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열심히 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더 신실하게 살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다니엘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욥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은 마치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서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고난 중에 그의 답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믿는 성도가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장래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합니다. 의를 이루어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환난을 인내를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인내의 의미는 우리 말로는 참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헬라 말로는 ‘휘포모네(uJpomonh)’라고 해서 세상을 이기는 정신을 뜻합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인내란 어려운 상황을 그냥 버티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란 세상을 이기는 힘을 생산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란 능동적으로 세상의 시험과 시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더 큰 소망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연어라는 고기는 강에서 태어나서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5년 동안 태평양 바다를 헤매고 다니다가 자기 고향, 강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 때 그들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폭포를 거슬러 오릅니다. 30m나 되는 높은 폭포가 떨어지는데 이걸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올라가서 또 그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알을 낳고 죽게 됩니다.

안도현 씨의 ‘연어’라는 책에 보면, 연어의 일생을 동화처럼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어들은 초록빛 강과 대화를 하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강이 하류로 흐르는 이유는 뭘까?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폭포 앞에서 전체회의를 합니다.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빼빼 마른 연어와 누구보다 말을 잘하는 주둥이 큰 연어, 그리고 연어들의 교육을 맞고 있는 지느러미 긴 연어와 연어들의 이름을 짓거나 앞날을 알아맞히는 족집게 연어 등이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은빛연어가 말합니다. 좋고 건강한 알을 낳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쉬운 길 보다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폭포를 힘 있게 다 같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과정 중에 은빛연어와 초록 강이 대화를 합니다. 은빛연어가 초록 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별이 아름다운 것은 어둠이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고, 꽃이 아름다운 것은 땅이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며, 연어 떼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마치 연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건강한 알을 낳는 연어와 같이 건강한 인생을 꿈꾸면서 폭포를 향해 힘차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내입니다.

예수님의 인내를 보십시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내는 버티는 인내가 아니었습니다.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인내였습니다. 고난과 고통,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지만, 더 큰 영광과 승리가 그 앞에 있음을 예수님을 보고 나아갔습니다. 성도에게 이런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또 그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힘은 바로 승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요 믿음입니다.


세 번째, 인내는 연단을 만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연단은 ‘연단된 인격’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character(인격, 품성)라는 단어로 주로 번역되었고, 헬라어로는 도키메(dokimh)라는 단어로 ‘연단된 인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불을 통과하여 모든 불순물이 타 없어져 버린 금속에 관하여 사용된 단어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만나면 ‘연단된 인격’을 만들어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인해 더 강해지고 순수해지며 하나님을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13년의 고생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9년이 지난 후 형들을 만났습니다. 두려워하는 형들을 향해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애굽에 판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하지만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들 앞어 나를 보내셨나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지 모릅니다. 13년의 고난의 세월과, 고향 떠나 외롭게 살아온 총 22년의 세월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그것이 보상이 될까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의 인내를 통한 연단된 인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인내, 그리고 연단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없는 것이 있게 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인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아픔을 겪을 때가 참 많습니다. 인생의 실패로부터 받는 상처도 적지 않지만, 더 큰 상처는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입니다. 이런 상처들은 쉽게 씻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상처가 연단된 인격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습니다. 형제에게 아픔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그로 인해 내 인생을 다 망쳤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 일 가운데 함께 하심을 믿고 오히려 용서의 손길을 펴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 앞에 있는 환난과 고난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할 것입니다. 환난은 세상을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을 팔아버린 형제까지도 용서하는 힘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은 성도로 하여금 더 구체적인 소망을 이룹니다.

연단된 인격은 비로소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그릇이 되었다는 사인입니다. 레이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본인은 위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위기로 인해 오는 기회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많은 환난은 우리에게 더 좋은 기회들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의 가장 밑바닥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부은바 됨이 우리를 오늘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소망으로 오늘도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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