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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설교] [오디오 찬양]
[비디오 설교] [비디오 찬양]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이사야 49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정말 행복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말씀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이를 테면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드러내신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상처 나고 멍들어가는 인간을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같은 경우는 인간을 거룩케 하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정결예법을 통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든 복잡한 법들은 사실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주셨던 명령들입니다. 자식이 어릴 때 부모가 일일이 목욕탕에 넣고 씻기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셨습니다. 그 모든 밑바탕에 깔린 하나님의 의도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로마서는 의에 대해 많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거룩케 하심은 제사적인 표현입니다. 의롭게 한다는 말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의에 대한 말씀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1:17).”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3:21).”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4:3).”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4:6).”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4:9).”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4:22).”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로마라는 나라는 법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삶의 자리에서 법적으로 사고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이론을 펴거나 말씀을 전할 때 법적인 논리로 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익숙한 법적인 논리로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적인 용어로서 의란 무엇입니까? 의란 법정 앞에서 판사가 피고의 죄의 유무를 밝힐 때 무죄를 선언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판사 앞에 선 피고인은 법정 앞에서 ‘의’가 필요합니다. 판사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을 받으려면 법이 요구하는 합당한 모든 조건들을 충족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운전자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법규 위반으로 법정에 갔습니다. 그러면 운전자는 자신이 운전 중에 필요한 모든 법규를 준수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과속을 하지 않았고, 안전벨트를 착용했으며, 차선을 준수했는지,  추월차선이 아닌 곳에서 추월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중 하나의 혐의도 드러나지 않으면 그는 ‘의롭다’고 판정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 하나라도 어긴 것이 드러나면 그는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논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 이런 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의’라고 표현합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한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만든 기준에서 의가 아닙니다. 교통 법규를 지키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의입니다. 그 의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기억할 것은 의가 과연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란 모든 법규를 지켜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법을 지킨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규정이라도 어기면 그에게는 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삶에 있어서 상당히 어려운 곤경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늘 그러한 규정들을 지키기 위해 힘쓰다 보면 우리의 삶은 무미건조해 질 것이고, 힘든 삶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한번 경찰에게 ticket을 끊게 되면 이로 인한 삶의 손실이 얼마나 큰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한번 티켓을 끊게 되면 벌금만 물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court에 가야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가서 하루씩 교육을 받기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법을 어기는 것도 동일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규정을 어기는 것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합니다.

오늘 말씀의 관심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나라의 법이 아니고, 어떤 회사의 규정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규정들을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규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모두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생명이 충만한 삶입니다. 에베소서 2장의 표현대로 하면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표현으로는 거듭난 삶이라고 할 수 있고, 요한복음 5장 24절의 말씀으로는 영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죄를 용서받은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그러한 행복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는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삶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이것은 가장 정상적이고 충만한 삶입니다. 가장 인간다운 삶입니다. 생명이 있고, 충만한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이러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친히 우리에게 의가 되어 주실 방법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 여겨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자로 칭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17절의 말씀대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못할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에게 의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자기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인간의 생리적 상황으로는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의 아내 사라도 역시 나이가 90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몸은 마치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살아있기는 했지만, 자녀를 낳는다는 면에서는 아무 기능도 할 수 없는 죽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보면서 소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면서 소망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전혀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이르는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나 율법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음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잘 압니다. 요셉은 나이 17세에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렇게라도 하면 어떤 수가 있을 것을 처음에는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도 조금씩 더 들어갑니다. 20세가 넘어서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갈 꿈은 아예 꾸지도 못합니다.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좀 더 나은 노예가 될는지는 몰라도 이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자기의 여주인이 자기를 유혹합니다. 이것은 유혹이기도 하지만, 요셉에게는 정말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유혹을 거부하면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갔습니다.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인생을 덮고 있습니다. 살아갈 길은 점점 더 보이지 않습니다.

저라면 그런 상황에서 쉽게 유혹의 자리로 갔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저의 인생을 더 낫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았습니다. 요셉이 바라보고 믿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가 믿은 하나님은 오늘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그를 위대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에 있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그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드려 보겠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은 목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여러분들이 저를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하면 아마도 제가 알고 있던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흠과 단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의를 충족하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목사다운 목사가 되려면 어떤 일들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방도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잘 해야 하고, 행정도 잘 해야 하며, 모든 일들에 있어서 탁월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니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일들을 위해 애쓰다보면 저는 어떤 일들을 이루기보다는  훨씬 더 많은 면에서 실족하고 넘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설교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설교의 한계를 경험할 것입니다. 날마다 회의와 한계를 느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목회를 계속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심방과 성경공부에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그런 일들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 중에는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만 하면 훌륭합니다. 더 욕심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예요. 지금도 잘 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저에게 긍정적으로 격려한다고 해도 저는 저 자신에게 날마다 한계를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 많은 한계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하려는 것이 잘 안되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밖으로부터 오는 상황도 좋은 방향으로 가주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지 않으신 것인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이 하신다고 해도 내가 부족하면 못하는 것일까? 나의 능력은 여기까지인가?

그런데 그런 순간마다 저를 붙잡아주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하실거야! 나에게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없을거야! 그리고 기도하면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때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매우 큰 일일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매우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저로 하여금 새로운 용기를 갖게 하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고 확신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비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했지만, 실은 아브라함과 많이 실수하고 넘어지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을 후, 사실 자신을 돌아보니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이는 들어가고 아기는 없는데, 무슨 수로 이제 아기를 갖는단 말입니까? 아이는 10달이면 낳는데, 아브라함은 아기를 낳기 위해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는 중에 아브라함에게 실수도 있었습니다. 자기 종인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도 했고, 자기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수와 허물 중에도 그는 결국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연약한 아브라함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시겠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의 역사는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는 자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때, 그 믿음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교회당을 지을 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과연 어디까지 잘 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분명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면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 건축하는 일로 먼저 절망해 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능력을 맛보기 전에 힘이 빠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으로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절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실제 모든 일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중에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삶의 자리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이 잘 안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의 여건과 상황도 결코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힘든 상황은 당분간 계속 될지도 모릅니다. 새해가 될 때마다 아브라함이 자기와 부인의 나이를 계산하면서 늘어가는 나이를 볼 때마다 그들이 한숨을 쉬면서 낙심하는 상황이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뜻이기 전에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소원이기 전에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기를 원합니다. 샬롯츠빌한인교회를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라고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형집행을 하던 백부장이 그의 운명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교회를 보면서 정말 하나님은 21C에도 여전히 살아계심을 보이기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소원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의 삶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들어나기를 원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그 하나님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정말 흥미롭게 즐거우며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간 그 일은 정말 쉽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에는 그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결국 위대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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