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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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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년의 아들이 그의 노모에게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둘째, 성가대원들이 자주 음을 틀려 마음이 아프다. 셋째, 교회 장로님의 기도시간이 너무 길어서 언제 끝날지 몰라 항상 긴장된다. 그 때 그의 노모가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네가 교회에 꼭 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둘째, 주일예배는 신앙생활의 기본이다. 셋째, 네가 그 교회 담임목사이기 때문이다.

예배에 대해 흔히 사람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잘 꼬집고 있는 듯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직장이나 학교에 가면서 일어나는 것은 힘들지 않은데, 예배시간을 맞추기 위해 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배시간 11시에 오는 것도 쉽지 않지만, 성가대가 9시까지 와서 성가연습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다 보면, 틀린 것만 잡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가대가 오늘은 두 번 음이 틀렸네.’ 장로님 기도시간 재는 것을 취미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를 설교를 듣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에 감동을 받으면 ‘오늘 예배 잘 드렸다’고 생각하고, 반대의 경우는 예배를 잘 드리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그 이상입니다. 설교에 감동을 받고, 찬송을 부르고 들으면서 느끼는 감동 이상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우리 말 갖지 않아 ‘인생의 목적’이라고 바꿨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인생의 목적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첫 번째 답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나오는 ‘예배’라는 단어들로는 ‘아바드’, ‘샤하’, 그리고 ‘프로스퀴네오’, ‘라트류오’ 등이 있습니다. 이 단어들의 공동된 의미는 ‘섬김’, ‘부복’, ‘경배’, ‘받들어 섬김’, ‘를 향해 입을 맞춤’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이 모든 단어들은 대부분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즉 예배란 경배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만 온전히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영어의 ‘worship'이라는 단어는 가치라는 의미의 ‘worth'와 신분이라는 뜻의 ’ship'이 합쳐서 된 것입니다. 즉 최상의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께 드려지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들 중에 하나는, ‘예배’를 ‘예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식이 아닙니다. 예배를 예식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예식이란 예의를 갖춰 식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란 예배자의 마음과 몸으로 온전히 경배하는 것입니다. 온 맘으로 모든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경배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식은 정해진 순서와 절차에 따라 드려져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이 되면 여의도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합니다. 수많은 연습과 훈련을 통해 그들은 조그만 실수도 하지 않고 행진과 도열을 합니다. 우리는 그 국군의 날 행사를 하는 군인들이 그 행사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애인생각을 하던, 아니면 자기의 장래 일을 궁리하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틀리지 않으면 됩니다. 정해진 대로 잘 해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예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도 요즘은 하나의 event처럼 철저한 기획과 준비를 합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 상황이 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예배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란 외적인 형식과 모양보다 오히려 마음의 중심과 자세가 더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가대가 비록 음이 틀리고, 박자가 안 맞아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장로님들의 기도를 3분, 길어도 5분을 넘지 않도록 규정하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시간을 넘길 수 있습니다. 기도자의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면 넘길 수 있습니다. 준비 안 된 기도는 문제가 있지만, 시간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배에는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에는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거룩함이 있습니다.

모세가 나이 80세 쯤 되었을 때, 호렙 산에서 양을 치는 일을 했습니다. 애굽의 왕자였던 그가 그들의 추격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는 신기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 보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곳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신을 벗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 앞에 모세는 발에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추함을 벗는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시간, 그래서 우리의 추한 신을 벗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중세기 구라파에는 흑사병(페스트)이 만연되어 당시의 구라파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구라파에서는 페스트를 만연시킨 것이 바로 유태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이 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들은 흑사병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유태인이 흑사병에 잘 감염되지 않았던 이유는 극히 간단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구라파인의 생활은 야만적이었습니다. 위생관념이 거의 없어 목욕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비누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하니 얼마나 불결한 생활이었나 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유태인은 오래 전부터 목욕을 했습니다. 식사할 때마다 손을 씻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키는 율법의 내용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당신의 제자들이 손도 씻지 않고 식사를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목적이 바뀌었지만, 그들이 손을 씻고 자신을 청결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이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신전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그 엄청난 페스트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맛보고, 경험하며, 또한 자신을 거룩하게 할 것을 결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그 무서운 질병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삶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영적 흑사병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거룩함과 순결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상대주의적 사고 가운데 빠져있고,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육체적인 거룩함을 잃어버리면서 수많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혼탁하고 병들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정신적, 영적 거룩함이 필요합니다. 거룩함이 우리의 생명을 지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우리에게 누구도 거룩함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을 벗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전 삶을 통해 고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함을 맛보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예배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 육신의 신을 벗고 나와야 합니다. 더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하면 그 거룩함을 회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거룩함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대해 생각하면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예배에는 ‘희생제물’이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제사라는 말과 예배라는 말이 함께 나옵니다. 산제사(living sacrifice)가 곧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제사라는 말은 주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배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와 예배라는 말의 결정적인 차이는 제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 제물을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식입니다. 그 죄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행복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 죄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힘써도 우리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냥 공짜로 구원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반드시 정결한 짐승을 하나 잡아 와서 그것을 불로 태워 드리게 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죄 용서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짐승이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지만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죄인의 모양으로 가장 극한 죄인이 지는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은 결코 공짜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는 더 이상 우리가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진짜 희생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제사와 예배는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어떤 짐승을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고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더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산 제물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 인생의 주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다시 그 목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배는 바르게 드려져야 합니다. 흔히 예배를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삼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예로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때 그들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려고 언약궤라는 것을 전쟁터로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궤를 통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의 명예를 위해 헌금했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무엘 선지자는 미스바에서 블레셋과의 전투 전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터에 나가기도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제물은 죽어야 합니다. 죽은 제물이 자기의 의지를 따라 살아갈 수 없듯이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우리는 자신이 산 제물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죽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새로운 삶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예배 가운데는 기쁨과 회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예배는 예배라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굳어진 얼굴로 교회에 왔다가도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얼굴이 쫙 펴져야 합니다. 만약 마음에 기쁨이 없이 교회에 오셨더라도 돌아가실 때는 기쁘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은혜를 누리고, 기쁨을 얻고 돌아가야 합니다. 기쁨은 우리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기쁨이 없다면 주님 앞에 나아와 그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스바냐 3장 14절과 1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기쁘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 외에도 빌립보서 2장 18절에“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고,빌립보서 4장 4절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요한복음 16장 22절에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배를 예배답게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예배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힘이 있는지 경험할 것입니다. 전심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것임을 경험할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이 우리들끼리만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고 그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대부분 모든 예배에서 그것을 잊어버리고 예배드립니다. 이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겠다는 몸부림으로 예배드려보세요. 예배에 집중하세요. 준비된 예배를 드리십시오. 비록 찬송가 멜로디는 몰라도, 가사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며 찬송해 보십시오. 그것이 나의 고백이 되게 해 달라는 마음으로 찬송하십시오. 기도하는 분이 나와서 기도할 때 동일한 마음으로 ‘아멘’을 외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십시오. 말씀을 들을 때도 그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그리고도 아무런 일이 없으면 그 땐 하나님께 항의하십시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경험하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주님을 거룩하심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영적 거룩과 순결을 지키는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를 위해 제물로 돌아가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산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전심으로 집중해서 예배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재하심을 발견할 것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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