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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모두 그 하나님을 찾을 이유도 없고, 그 하나님 앞에 나올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또 다른 하나의 모습은 ‘진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백하는 사랑의 하나님은 또한 ‘진노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에 대한 언급보다 하나님의 화와 격노하심 그리고 진노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은 신약과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과 그 두려움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훔서 1장 2-8절입니다. <b>“2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5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한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b>

어떤 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의 책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아담과 하와를 벌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진노로부터 요한계시록 17-18장과 20장에 나오는 바벨론 멸망과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묘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죄를 용서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를 그냥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추호의 죄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지 못합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좋게만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이해하고 그 진노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해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못했을 때 진노하시고 무서운 벌을 내리시는 그 분이 바로 나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 분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며, 얼마나 많은 희생을 지불하면서 용서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값은 사망(롬6:2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무서운 법은 여전히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셨고, 홍수로 지구를 쓸어버리기도 하셨고,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생활하게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진노 중에 가장 큰 진노는 십자가의 진노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보시고 진노하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은 그 진노를 십자가 위에 달리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칼 브라이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그분의 성품이 너그럽고, 인간의 죄에 대해 쉽게 넘어가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분은 또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인간을 위해 친히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는 바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은 경건치 않음과 불의를 행한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19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20절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부인하든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자연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고백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건한 삶을 살아갑니다. 불경건한 삶이란 21-23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시편 14편 1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부족함이 없이 자란다고 해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면 정서불안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장애와 질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장성해서 사회생활이 어렵고 됩니다. 부모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듣고 자라야 하고, 때로는 책망과 매를 맞으면서 그 안에서 부모의 사랑과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도 동일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바른 반응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것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 안에도 있는지 우리는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마음과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언제나 있습니까? 허망한 생각에 매여서 헛된 것을 좇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삶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살면서, 그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지는 않습니까?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곧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 인간의 삶은 여러 가지로 왜곡되고 뒤틀리게 됩니다.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뒤틀리고 무질서와 혼란에 빠진 이유를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 버려두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보면 24절과 26절 그리고 28절에 ‘내어 버려 두사’라는 동일한 말이 나옵니다. 24절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하고 있고, 26절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28절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합니다.

이 ‘내어 버려두심’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치 못했던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중에 가장 큰 진노는 바로 그냥 내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렸습니다. 자기 맘대로 하게 둡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이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가 바로 내어 버려두심입니다.

어린 아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때 부모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이의 일을 말립니다. 그러다가도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맘대로 하라’고 포기합니다. 이 때 아이는 말합니다. ‘이제 자유다! 내 맘대로 할 수 있구나’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순간이 바로 심판받는 순간입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에 실패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하지만, 때로는 성공하는 것이 심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관심 없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높은 지위에 올라가든, 낮은 지위로 내려가든,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입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되지 않습니다. 남을 속여 먹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안 믿고도 잘 삽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해도 성공하고 자녀들이 잘 되어 갑니다. 그래서 부러워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냐고 질문합니다. 획일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화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화가 나에게는 복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잘못에도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교회 조금 늦게 와도 마음의 가책을 느낍니다. 예배마치고 성도들 간의 인사를 하는데, 집에 가서 생각해 보니 꼭 인사해야 할 성도를 그냥 지나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 성도가 상처나 받지 않았을까? 염려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 와서 그를 더 기쁜 마음으로 반겨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냥 내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찔림을 느낍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고쳐 잡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성도입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세 가지 결과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셔서 피조물을 조물주를 더 경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것들에 매여 삽니다. 나무에 절하고 무당을 찾아다니며 점을 보러 다닙니다. 자신의 운명을 한낮 무당들에게 맡깁니다. 조상의 묘를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후손의 운명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묘를 잘 세우기 위해 모든 돈을 다 들이고, 그리고 난 후 온 집안에 어려움을 겪고 맙니다. 그들은 모두 운명론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셔서 자연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은 그런 세상의 것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어 버려두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운명을 아무런 힘도 없는 피조물에 맡겨 버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권에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 횡재해 보고 싶어 합니다. 내 인생의 운명을 거기에 걸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는 조금씩 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성령의 또 다른 음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한 인간들의 조작된 운명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결단이 날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두 번째 결과는 부끄러운 욕심 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부의 성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인간은 그 성을 마구 남용합니다. 아름다운 성을 추하고 더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도무지 절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성적인 타락의 극치가 바로 동성애입니다. 로마서가 쓰여 질 당시에도 동성애가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로마서가 쓰여 질 당시 로마는 세계의 최강국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들은 누리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살았습니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은 동성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로마의 초기 15명의 황제들 중에 무려 14명이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 당시 철학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또한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를 통해 신랄하게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의 말에 의하면, 당시 로마 황제의 최대의 고민은 성병 처리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얼마나 타락했으며, 그들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성애의 결과로 오늘날 사람들은 AIDS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AIDS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동성애자들은 아니지만, 동성애로 인해 시작된 이 질병은 지금 온 세계를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 AIDS를 흔히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아이고(A) 이제(I) 다(D) 살았다(S)'의 약자라고 합니다. 얼마 안가서 이제까지 전쟁에서 죽은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AIDS로 죽어갈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게도 이러한 유혹들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이러한 유혹들은 오늘날 전 방위적으로 우리의 자신을 빼앗습니다. 인터넷과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도무지 막을 길을 찾지 못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도들은 이러한 일에 자신을 내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내어 버려두신 자들의 운명입니다. 오늘 성도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질서한 성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아름답게 만드신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성을 깨끗하고 고귀하게 사용하는 지혜와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혹 자신이 이런 위험 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성을 아름답게 지키고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결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신 세 번째 결과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목록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왜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고 추악한 일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마음,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바르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죄의 목록 가운데는 살인과 악의, 분쟁, 그리고 부모를 거역하는 일 등과 같은 큰 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죄목들 가운데 또한 탐욕, 수군수군하는 일, 비방, 교만, 자랑과 같은 비교적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죄의 목록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나오는 죄의 목록에 너무도 죄책감 없이 빠져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인을 하지 않았어도 남을 미워하는 마음만으로 살인한 죄와 동일하다는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또한 우리가 범하는 일들도 여기에 열거된 끔찍한 죄들과 동일선상에서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남을 비방합니다. 험담을 합니다. 수군수군합니다. 재미있습니다. 남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내어 버려두신 진노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의롭고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면에서는 도무지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우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일들은 나만 하는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더라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해지고, 하나님의 버려두심의 시작입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을 즐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버려두신 인간의 특징들입니다. 우리가 남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즐길 때, 그 사람들은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더 지나치면 신앙의 시험이 되고, 때로는 교회와 주님의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상처를 줄 자격도 없을뿐더러,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그 주님께서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상처주고 아프게 하고, 결국 믿음을 잃게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주님 앞에 가서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주님! 저는 살인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저는 불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고 욕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힐 것이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마5:22)’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내어 버려두신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이 말씀을 왜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우리 머리 위까지 임하였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흔히 고백하듯이 사랑의 하나님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진노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도 크고 엄청나기에 우리를 향하신 사랑도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진노를 우리에게 쏟기에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 진노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으신 하나님을 오늘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면서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신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내어 버려두신 인생의 삶의 모습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를 만드실 때 갖게 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우리에게 내려야 할 진노를 대신 지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그런 삶의 자리에게 떠나지 않는다면 그 진노는 다시 우리에게 임할는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깨달읍시다. 그리고 주님 앞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악한 자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 앞에 더욱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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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 하나님의 진노(롬1:18-32) 2006. 1. 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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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 종교인의 죄(롬2:17-29) 2006. 1. 22 주일예배
800 믿음의 남용(롬3:1-8) 2006. 1. 29 주일예배
799 하나님의 한 의(롬3:19-31) 2006. 2. 5 주일예배
798 아버지가 되십시오(눅15:28-30) 2006. 2. 12 주일예배
797 믿음으로 얻는 의(롬4:1-8) 2006. 2. 19 주일예배
796 믿음으로 얻는 행복(롬4:9-16) 2006. 2. 26 주일예배
795 목적이 이끄는 삶(창1:26-28) 2006. 3. 5 주일예배
794 인생의 목적(1)-예배(롬12:1) 2006. 3. 12 주일예배
793 인생의 목적(2)-교제(행2:43-47) 2006. 3. 19 주일예배
792 인생의 목적(3)-그리스도를 닮아감(엡4:22-24) 2006. 3. 26 주일예배
791 인생의 목적(4)-섬김/사역(요13:12-17) 2006. 4. 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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