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16-24) 2010. 8. 8 주일예배

by 주병열목사 posted Aug 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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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말씀이 마쳐갈 즈음에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애매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기보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알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염려요 근심거리고, 두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직면하기를 꺼린 것입니다.

요즘 미국에는 동성 결혼 문제로 떠들썩합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동성결혼 금지법안(주민발의 8호)이 2년 전 캘리포니아 주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통과시킨 바 있었는데, 이번에 연방 법원에서 이 법안이 헌법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로 인해 염려하고 있고, 또 동성 결혼에 대한 지나친 대응으로 어떤 사람들을 교회를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 진리에 대한 조바심이 있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진리의 선포는 매우 담대할 수밖에 없고,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과 사도행전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에게서 진리 선포의 담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진리로 인한 조바심을 드러냅니다. 진리가 저들의 의지에 의해 없어지거나 사라질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이런 조바심은 진리에 대한 확신의 부족으로부터 나오는 반응이라고 여겨집니다.

진리는 결국 진리로 드러납니다. 진리는 세상의 논리와 상황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면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씨름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한 말씀 때문입니다. 보지 못함은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즉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고, 다시 보리라는 말씀은 부활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직접 대면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다시 주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결과입니다. 즉 진리는 진리로 드러날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누명을 쓰시며 고난과 조롱,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한정된 시간 안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먼저는 곡하고 애통이 있을 것이지만, 제자들에게는 궁극적인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21절에서 여자의 해산을 비유로 다시 재차 설명하십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산모는 근심하고 두려워하지만, 아기를 낳은 후에는 아기 낳은 사실을 인해 더 크게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산모를 근심하게 했던 그 아기로 인해 다시 기뻐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산모의 근심과 두려움을 대신 보상하기 위해 다른 위로의 선물을 통해 기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근심거리였던 태중의 아기로 인해 반대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비유)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심과 어려움 그 자체를 통해서 기쁨과 소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근심이 내일의 기쁨이 되고, 오늘의 고난이 변하여 내일의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3장 5절과 느헤미야 13장 2절에서도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근심을 복으로 바꾸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내려갔고, 보디발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곳에서도 바로의 신하에게 잊혀진 인물이 되었었으나, 결국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즉 하나님은 요셉의 고난을 갚아주시기 위해 다른 대용품을 주시지 않고, 그 자체를 통해 결국 요셉의 인생을 승리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려움과 근심으로 인해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아픔과 고난 그 자체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후에 형제들을 만났을 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45:5, 7)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런 일들은 믿음의 사람들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수의 상징이고, 패배의 상징이었지만, 곧 승리의 상징으로 변하였고, 영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은혜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는 지 다시 말씀합니다. 이러한 주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22절). 요셉이 그렇게 모진 고난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 주시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얻는 기쁨, 고난이 복으로 바뀐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인해 얻는 기대와 소망, 그리고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얻음으로 인한 기쁨보다 큽니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주님께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23절). 모든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깨달아집니다. 전에는 혼동 가운데 있었습니다. 잘 알지 못해서 더 힘들었습니다. 도대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갈등하고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 있고, 모든 것을 선하게 바꾸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고, 우리의 미래를 주님께 맡길 수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또한 승리의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을 우리가 누리고 기쁨으로 살아가고, 또 그런 삶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을 바라보믄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 위에 좀 더 인내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발걸음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놀라운 기쁨의 삶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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