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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로 시작해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로 끝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룟 유다를 매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선을 파악했고, 군중들이 없는 시간, 가장 적절한 시점에 예수를 체포할 계획을 완벽하게 세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흔들려도 빼앗기지 않는 평안입니다. 제자들에게는 평안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평안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평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주님은 이 평안을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27절).”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바깥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어떤 조건이 갖춰졌을 때 옵니다. 예를 들면 경제적인 안정을 얻을 때 오는 평안입니다.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것을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줄 때 평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평안입니다. 외부의 조건이 우리를 평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조건들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위로부터 오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과 조건에 의해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성경은 샬롬()이라고 말씀하고, 에이레네()라고 말씀합니다. 이 평안은 모든 근심과 고난을 소화해 버리는 평안이다. 조건과 상황이 주어져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평안함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조건과 상황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장에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리아는 처녀로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 가브리엘이 와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당시 가장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떨어진 마리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위기 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모든 상황에서 평안을 누렸고, 그 평안으로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환경과 상황에 의해 평안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평안을 잃어버리자 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모든 근심과 염려를 다 소화해 버리는 평안이고, 위기 가운데서도 누리는 평안입니다. 적들의 공격 앞에서도 누리고, 조롱과 아픔 속에서도 간직한 평안이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절망한다면 마리아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포기한다면 마리아 같은 여인이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금방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에이! 그게 무슨 평안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런 것은 평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기 가운데 평안이 있다는 말은 그냥 오기로 견딘다는 말이지, 평안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곧 당신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제자들에게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시고, 그 평안을 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평안을 누리는 일이 실패했지만, 곧 그들은 평안을 누렸고, 그 평안 가운데서 담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안은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1. 평안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주어집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왜냐하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나아갑니다.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버지께서 자신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가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씨름하는 일도 잘 아는 사람에게 가져가면 한 순간에 고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ㅣ로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께 나아가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조주시며,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너희가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단순한 논리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쉽게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전능자라고 찬양하면서도 막상 삶의 자리에서는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문제가 있음에도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불신입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불신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이 말씀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알긴 뭘 알아!’라고 말해 버립니다.

우리가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의 문제로 아파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나사로의 죽음은 더 이상 그들에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아감으로 문제의 해결을 받았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그분은 우리의 문제를 전혀 다른 각도로 보시고, 전혀 다른 면에서 해결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는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근심 없는 삶,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려면 지금보다 한 걸음 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더 크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이 평안을 누리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평안은 믿음으로 인하여 누립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고백하며 그 앞에 나아가지만, 자주 멈칫거리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로 다가갈수록 더 어렵고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의 길이라고 하지만, 막상 믿음의 삶은 그렇게 순탄해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게 느껴집니다. 그냥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더 좋아 보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소리 다하고,         때로는 죄를 지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29절은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말씀합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 믿음은 이 사건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당신 앞에 전개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과 상황을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세상은 그 순간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세상은 모두 주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세상의 임금이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권의 힘을 업고서, 빌라도의 허락 하에서 유대 병정들이 예수를 잡으러 옵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원리에 지배받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임금이 예수를 잡아 채찍질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만, 그것은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막지 못합니다. 더 이상 그는 주님의 일에 관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권세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안은 믿음으로 인하여 누리게 됩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평안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어려움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오. 근심을 버리십시오. 마음의 평안,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십시오.


3. 진정한 평안은 사랑과 순종에서 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순종입니다. 31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 즉 성부 하나님께 얼마나 철저히 순종하는 지를 세상으로 알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순종을 세상에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평안을 누리는 굉장히 중요한 비결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평안을 말씀하셨는데, 그 평안의 근거는 바로 사랑과 순종이었습니다. 여기서 순종은 위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명령한 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의 결과에 대해서도 명령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 순종의 결과까지도 성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맡길 수 있으면 평안이 오고, 맡길 수 있을 때 기쁨이 옵니다. 맡기지 못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결코 만만한 것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아마도 매우 힘써야 성취할 수 있는 삶의 무거운 과제들을 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경우는 마치 나사로의 죽음 앞에 서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이미 손을 쓰기 어려운 상황까지 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은 나사로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살겠습니까? 주님께서 무덤 앞에 와서 말씀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11:39).” 그 때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왜 평안이 없을까요?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탁하지(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순종은 책임까지 위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 그 일을 성취하는 것은 주님의 손에 넘어갑니다. 주님께 책임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 그 책임도 주님께 넘어갑니다. 그러나 순종하기 전까지 그 일은 우리의 손에 있으며,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평안이 없습니다. 그 믿음은 그냥 외적인 종교적 행위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순종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 일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 관계 때문에 어렵고 힘드십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면 그 다음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불편한 관계에서 사랑하는 것은 자칫 상대방에게 얕잡아 보일 수 있다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교제의 악수를 나누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가는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가 내 맘대로 성장해 주지 않아서 고민입니까? 그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생명의 주인이며, 부모임을 고백하십시오. 한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후아겨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1:27-28).” 이 아니가 내 아이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원하는 아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건강의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해 보십시오. 주일을 성수하십시오. 매일 일정하게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적으로 절제된 삶을 살아가십시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그리고 그 몸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최소한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기도해 보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건강은 지켜질 것입니다.

물질로 인해 어렵습니까? 늘 재정으로 인해 고민하고 괴롭습니까? 하나님께 맡겨 보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어떻게 맡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재정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내 모든 재물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왔으며, 또한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십일조는 그런 고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주님의 것을 돌려드린다는 믿음으로 드리고, 또 남은 재정도 내 것 내 맘대로 쓴다는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사용한다는 마음으로 사용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면, 곧 하나님께서 책임도 함께 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책임을 하나님께 위임하고 나면 마음의 평안이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보음 11장 28-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삶의 용기와 능력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충만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께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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