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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츠빌한인교회

목적이 이끄는 삶

형제를 위해 깨어지는 삶

관리자 2016.08.28 22:53 조회 수 : 145

아래의 글은 Kefa Sempangi 목사가 "Walking in the Light"이라는 제목으로 Sojourners Magazine의 1978년 2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우리 말로는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이란 제목으로 IVP 출판사에서 1982년 소책자로 번역 발간하였습니다. 아래의 글은 소책자의 오역을 바로 잡기 위해서 전부 새롭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1961년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 지금은 고인이 된 몬도씨를 소개받았다. 그는 우간다의 부흥단(Revival Fellowship)의 창설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는 것에 나는 깊이 매료되었다.

 

몬도씨의 가르침을 통해 나는 동부 아프리카의 신앙부흥운동에 대해 알게되었다. 1930년대에 여러 우간다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 모임을 갖고 교회 예배에 참석하느라고 바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그리스도가 가르친 핵심 메시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물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모임을 위해 죽으셨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위해 죽으셨는가?

 

그들은 네가 경건의 삶을 누리기 전에 낮 동안 잘못 대했을지도 모르는 형제, 자매와 관계를 회복하라(마 5:23)고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속히 가서 바로 잡으라는 명령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경건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큰 대가를 지불하신 것은 우리의 하나님과의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였다. 그 관계들이 상할 때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된다.

 

깨어진 관계는 독이다. 성경은 예외를 두지 않는다. 상처를 준 사람이나 상처 받은 사람 둘 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에 대해 불편함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만일 누군가 당신을 해코지한다면 당신은 그를 꾸짖을 의무가 있다. 만일 그가 회개한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해야만 한다.

 

부흥단의 회원들은 또한 서로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공히 빛 가운데 거하면 주님으로부터의 치료의 역사가 임한다고 말했다 (약 5:16; 요일 1:7). 하지만 빛 가운데 거함이 없으면 우리의 기도와 교회 예배는 가짜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몬도씨는 만날 때 마다 인사말로 나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회개하십니까?”

 

“빛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까?”

 

“깨어지고 있습니까?”

 

회개

몬도씨의 질문은 내가 같이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갖고 있던 교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예리한 판단이었다. 점차 몬도씨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같이 사역하는 것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교제하는 것을 위해 죽으셨다. 그는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을 위해, 우리가 죄를 서로에게 고하는 것을 위해 죽으셨다.

 

나는 부흥단의 첫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집회 장소에 걸어 들어갔던 때를 기억한다. 그것은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집회 장소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고 찬양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찬양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피에 대한 것이었다. 한 사람씩 일어나 죄를 회개했다. 어떤 형제가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형제가 고백한 죄에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자매 차례에는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다른 찬양을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 떨리긴 했지만 나도 마침내 일어섰다. 나는 나를 창조하신 분에 대한 과거의 불신앙과 그것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렸던 나의 삶에 관해 고백했다. 내가 마치기도 전에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에 대해 찬양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에 앉았을 때 한 형제가 나에게 와 나를 포옹하면서 “형제님, 이것이 승리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성도 간의 교제인가?” 나는 반문했다. 이 형제와 자매들은 나의 죄에 관해서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몬도씨는 나에게 나중에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자네의 죄가 아니라 자네의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일세. 우리는 자네가 죄의 사슬을 끊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는 것을 들은 것이란 말일세. 우리 스스로는 결코 어떤 형제에게 가서 ‘내가 어리석었어. 나를 용서해 주게.’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이런 일은 오직 은혜가 임하고 우리의 자존심이 깨어질 때만이 가능한 일이지.”

 

1970년대 중반 한 여자 분이 우간다의 지하에서 계속 열리던 부흥단 모임에 관한 편지를 보내왔다. 한 모임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부정직의 죄에 관해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 그들은 이 죄를 서로에게 고백했다. 아민의 스파이 하나가 그들 중에 있었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거짓을 고백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인 척 그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스파이였다고. 그 사건 이후로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나는 이제 몬도씨가 말했던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 내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내 형제와 관계를 소홀히 한다면 나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교회를 가면서 내 자매에게 거리를 둔다면 나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다. 내 형제와 자매 앞에서 투명한 삶을 기꺼이 실려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모임은 다른 형태의 소외에 불과하다. 빛 가운데 거함이 있는 곳에 이런 모임들은 찬양하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넘쳐 흐르는 것들이다.

 

내가 젊었을 때 들었던 선교 명령에는 강조점이 “사랑하라”에 보다는 “가라”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이었지 형제가 아니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설교했던 사람들 보다 나의 설교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지상명령(commission)을 수행하고자 하는 나의 열심 때문에 나는 사랑하라는 명령(commandment)이 먼저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간데라 (허리케인 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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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씨로부터 나는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 나의 비밀을 완전히 나의 형제, 자매들과 같이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배웠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비밀)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내 아버지의 비밀)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 15:15). 우리가 비밀을 같이 나눌 때 우리는 서로 완전한 일체감을 갖게 된다. 상호 연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같이 빛 가운데 거하게 될 때 험담(gossip)의 여지가 사라진다.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험담을 쫓아버린다. 이미 다 아는 비밀에 관해 소곤 거릴 이유가 조금도 없다. 험담 대신 같이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형제의 약점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의 약점을 감춰주고 그의 강점을 부각시켜줄 수 있게 된다.

 

만일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나는 절대로 나의 형제, 자매들과 빛 가운데 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점차 나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가 무엇이 되도록 지으셨느냐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빛 혹은 더 나은 말로는 불켜진 촛불이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사용하는 간데라(허리케인 램프 –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사면을 유리로 가린 등)를 생각하면 이것을 쉽게 이해한다. 간데라의 빛이 밝혀지려면 투명한 유리, 잘 다듬어진 심지, 그리고 깨끗한 기름이 필요하다. 만일 유리가 더러우면 불빛이 희미해진다. 심지를 잘 다듬지 않으면 불이 깜박거리게 된다. 그리고 오일이 깨끗하지 않으면 빛이 점차 어두워지다가 결국 꺼지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투명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심지를 가다듬지 않고서도 빛을 발산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는 기름을 오염시키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나온다. 분노, 정욕, 다툼, 그리고 원수에 대한 악한 증오심. 깨끗한 기름이 없이는 우리가 빛이 될 수 없고 우리 형제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 수 없다.

 

우리가 빛이 될 수 없을 때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할 수 없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죄 위에 죄를 쌓게 된다. 거기에는 화목함 대신 분노와 원망이 있게 되며 죄 고백함이 있어야 할 곳에 감춤이 있게 되며 용서함이 있어야 할 곳에 원한이 남게 된다.

 

나는 아내와 말다툼에서 질 때마다 나는 아내와 이혼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나는 그리스도가 그의 피로 내 결혼의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대가도 이미 지불되었다. 그것은 말다툼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더 이상 달려있지 않다. 그래서 욕하고 저주하고 싶어지는 날마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화평의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을 안다. 나는 유다를 싸워 물리치기보다는 그의 발을 씻기러 간다. 나는 은혜로 구원 받았다. 그리고 은혜는 내가 맺는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탱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의 전부라고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많은 부흥단 회원들도 그렇게 믿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은 모든 악의 일을 버리고 우리 삶에 은혜의 역사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내 마음을 겸손으로 채우고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도록 하는 것은 은혜의 역사다. 내가 형제를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은혜의 역사다. 그러나 내가 같은 경건그룹의 형제에게 죄를 고백함으로 아무리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지라도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것을 생활 가운데 실천하지 않을 때 나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의 아버지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고아의 아버지라고도 말하셨다. 그는 과부의 변호자요 죄수들의 해방자이시다. 그는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주며 정의를 빼앗긴 자들에게 공의를 배푸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시 68:5; 시 146:7). 그리고 그는 그의 교회에게 똑같이 하라고 명하셨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 시편 82:3,4

 

가난한 자와 억압 받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는 고백하지 않은 죄를 가지고 영원히 사는 자만큼 영적인 어둠 속에 사는 것이다. 만일 나의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이 은혜의 역사라면 내가 속한 지역사회의 무너져 가는 집들 사이를 걸으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가난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은혜의 역사다.

 

어떤 자매에 대해 내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자매와 화해할 때까지 내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면, 마찬 가지로 나의 이웃들에게 공의가 회복될 때까지 내 마음이 불편하도록 하는 것도 은혜의 역사다.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치유 사역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는 것도 은혜의 사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세상에 대해 빛이 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가정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가 속한 믿는 자들의 모임에 -- 빛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빛을 전혀 발할 수가 없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어둠으로 변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이끄는 무익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서로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깨져야 한다.

 

깨어지는 삶을 묘사하기 위해 부흥단 회원들이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 있다. 우간다 말로 “오쿠메니에카”이다. 영어에는 그와 같은 말이 없다. 그것은 깨어진 개인이란 말이다. 깨어진다는 것은 자존심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있는 곳에는 죄의 고백함도 용서함도 없기 때문이다.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져야 한다.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옳은 편에 속하는 것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는 빵 다섯 개를 가지시고 축사하신 후 그것을 쪼개어서 (깨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4:19). 부흥단의 한 형제는 이 구절을 읽고 나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나의 의지를 꺾으실 때까지 너는 빵 한 조각에 불과할 거야”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먹이시면서 하신 일은 후일 그의 몸에 일어날 일을 아주 잘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기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것을 너희를 위하는 (위해 깨지는)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불완전한 사람을 위한 사랑

우리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공동체 사람들에게 “이것은 여러 분을 위해 깨어진 나의 몸입니다. 나는 나의 모든 전문적 기술과 능력과 경제적 소유를 여러 분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놓겠습니다. 필요한대로 가져다 쓰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완전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버릴 수 없다. 우리는 죄인들을 위해 우리를 버릴 수 없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과 완전한 공동체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유다처럼 우리는 우리가 속한 믿는 자들의 몸에 부분적으로만 헌신하고 그들에 대한 반항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다. 몸 안에서 자기가 담당한 기능–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았던 바울과 달리 우리는 우리가 몸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 몸에 어떻게 반대하는가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우리가 예수를 쫓는다면 우리는 완전한 공동체를 기다릴 수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깨어지도록 했다. 예수님은 배반자들 가운데 공동체의 기초를 놓으셨가.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배반당하시던 밤 떡을 가지사…” 그는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깨진 나의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헌신과 똑같은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 한 우리는 공동체 안의 형제와 자매를 먹이는 데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때문에 그런 일을 감행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먹이라”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첫 반응은 그들이 가진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보라”(막 6:38)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다 먹이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작은 것들 – 떡 몇 조각이나 과부의 기름 몇 방울 – 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다. 모세는 그것이 가난한 한 양치기의 지팡이에 불과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가 가난한 양치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약한 자와 세상의 비천한 것들을 사용하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때 아내와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려고 발버둥을 쳤었다. 우리는 우간다에서 간신히 죽음을 피해 미국의 신학교에 왔다. 머지않아 나이로비로 피난가 있던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 편지들을 무시하려고 했다. 우리 식구가 살기에도 빠듯했다. 피난민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다른 피난민들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차츰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우리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깨어지셨다. 그는 우리의 작은 것들을 취하시고 그것에 축복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수천 명을 위한 피난민 구호기금을 설립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로 충성하기를 요구하셨다. 우리가 가진 작은 물질을 주기 시작했을 때 떡 다섯 조각의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 식구들이 먹고 살기에도 부족했던 것이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통해 많은 피난민들의 음식과 주거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깨어진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깨어진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혼자 초연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우리는 “영적으로 구제불능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서로 빛 가운데 거할 때,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고백할 때, 우리의 자존심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고 함께 세상으로 보내진다.

 

세상으로 갈 때 우리는 다시 깨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새삼 발견하곤 깨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돕고자 하는 그 사람들을 틍하여서 깨어진다. 1971년 한스 루크마커 여사의 도움으로 나는 우간다에 고아원을 설립했다. 어떤 마을에 가서 고아 한 명을 데리고 오는 일은 항상 나를 낙심케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내가 차를 몰고 떠날 때마다 10 명의 다른 아이들이 지쳐서 포기할 때까지 내 차 뒤를 쫓곤했다.

 

그때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주님, 열명의 다른 아이들은 놔두고 왜 한 명만 데려가야 합니까? 나에게 그들을 모두 도와줄 기회를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나 그때 깊은 좌절의 침묵 속에서 내 주인이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느끼곤 했다. “그 아이가 내가 너에게 맡긴 아이란다.”

 

하나님은 그때 나의 부족함과 나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가르치시길 원하셨다. 내가 가진 것은 턱 없이 부족했다는 것이 자명했다. 내가 알고 있던 악의 거대함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무 쓸모 없다고 느꼈다. 나는 내 자신의 무익함에 때문에 겸손해지고 깨어졌다. 그리고 그때 비로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의 사역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은혜로 깨어질 때 우리는 우리의 꺠어짐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는 멸시와 천대 가운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가 구원하려고 왔던 바로 그 사람들은 그의 희생에 대한 응답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은 일이 잘 되어 가지 않자 그를 버렸다. 그런데 우린 어쩐 일인지 우리의 운명은 우리 주인의 운명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종은 주인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 주인은 십자가 상에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거절을 받으며 죽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때 우리는 일이 잘 안되면 포기할 정도로 우리는 의기 소침해 있다. 우리가 우리 이웃들을 위해 깨어지려 할 때 우리가 도와 주려는 그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노력이 방해받을 때 우리는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주님 나는 이 죄인들을 위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가 도와 줄 다른 사람은 없나요? 좀 더 고마움을 느끼고 좀 더 재능있는 그런 사람들 말이예요? 내가 천국에서 좀 더 성공했다고 느낄만한 그런 사람말이예요?"

 

우리의 이런 질문들은 우리의 불순종과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게 될 때,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성공 사례로 만드는 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이 성공적인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신실한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삶으로 "이것은 너를 위해 깨진 나의 몸이다"라고 말하는 백성을 원하신다.

 

그럴 때에, 오직 그럴 때에라야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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