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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

술 취한 사람이 열쇄를 찾는 법

관리자 2016.08.28 21:52 조회 수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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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술 취한 사람이 한 밤 중에 집 열쇄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열쇄를 가로등 밑에서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거기서 뭐하세요?"  

 

"열쇄를 잃어 버려서 찾고 있습니다."  

 

"어디서 잃어 버렸는데요?"  

 

"저쪽에서요."  

 

"아니, 그럼 그쪽에 가서 찾으셔야지 여기서 찾으시면 어떡해요?"  

 

"여기가 더 밝잖아요?"

 

이 이야기는 The principle of the drunkard's search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과학 방법론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Abraham Kaplan의 "The Conduct of Inquiry"라는 책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범하는 과학적 사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나아가 이 이야기가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신앙적 사고의 오류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왜 죄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는 자기의 집 열쇄를 멀리서 잃어버리고 가로등 밑에서 찾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의 밝은 곳에서 자기의 죄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찾을 수 없어서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죄는 사실 어두운 부분에 숨어 있습니다. 그 자신이 거기에 감추어 둔 것이지요. 그리고는 거기에 감추어 두었다는 사실마저도 잃어버리곤 자기에게는 죄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오류는 과학자들도 자주 범합니다. 자기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가능하지 않다고 쉽사리 결론을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테네에 간 바울이 거기의 철학자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18)

 

에비구레오는 에피쿠르스 철학자(Epicureans, 혹은 쾌락주의자라고 불리운다)들을 말하고 스도이고는 금욕주의 철학자(Stoicists)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당시 철학의 대표자들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었고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사고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거절합니다. 이유는 바울이 그들의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종교"(이방신을 전하는 것)로 폄훼하고 철학자의 심각한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짓고 맙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도 따지고 보면 인생의 문제를 이 땅에서의 삶에 국한해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고민하고 그 안에서 해결해 보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가로등 밑이 밝기 때문에 거기서 열쇄를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바울은 아주 명쾌하게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의 삶이 또 있으니까요. 당신이 인생의 문제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가 더 밝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금욕주의를 초등학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골 2:20-23). 그들은 그렇게 불려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로 본질적인 질문은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의미가 있다고. 이 세상에 삶과 죽음에 관해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이 좀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주의적인 말이라고 생각될지 몰라도 난 이 말이 참 가슴에 와 닿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어디서 열쇄를 잃어버렸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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