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만들기 (펌글)

by 최영훈 posted Jul 3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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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와 달 사이트에서 퍼온, 김양규님의 글입니다. 읽으면서 저의 마음속에 있는 염소의 뿔을 수도 없이 발견하게 한, 그런 글이었습니다.

  최영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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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원 만들기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책 <제자입니까>를 보면 양과 염소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르헨티나에는 양이 많다. 양떼를 잘 살펴보면, 양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염소들을 보면 서로 들이받고 싸우길 잘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양(羊)과 염소를 구분하는 일은 쉽다고, 아주 쉽다고.

  거기엔 무슨 통역이나 영 분별, 혹 특별한 은사 등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싸우기 좋아하는 자인가, 화평하기 좋아하는 자인가만 알면 된다고 말한다.

  한 사람과 1, 2분 정도만 얘기를 나누어 봐도, 그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염소」이고, 복잡한 싸움판에서도 싸움을 뜯어말리며 평화를 제시한다면 「양」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간단히 구분하는 거란다. 결코 복잡한 게 아니란다.

  사람은 누구나 영향력을 미치게 되어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항상 옳은 말, 맞는 말만 하면서도 언제나 분기탱천해있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느냐 하는 게다. 그리스도인은 어찌하든 향기가 나야한다. 너와 나, 우린 모두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2:14-15)

  때문에, 말이 아무리 맞아도 듣고 있노라면 왠지 불편하고 힘들고 그리고 분노를 솟아오르게만 한다면 그 사람은 「염소」쪽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평화를 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감정 「샬롬」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 혹은 옳고 그른 것에 목숨을 걸고, 그로 인해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인다면, 그건 결코 그리스도인의 방식이 아니다. 「샬롬」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말씀이 생각난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립보서 2:14)

  일을 잘해내면 「양」이요, 못해내면 「염소」라는 게 아니라, 원망과 시비를 가지고 하면 일을 아무리 잘해내도 결국 「염소」란 뜻으로 푼다.

  정치계를 보면 안다. 정의를 위해서 늘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이제 포용하고 용납하는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부분엔 전혀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포용하고 용납하는 일은 이제껏 본 바도 배운 바도 없기 때문이다.

  잡초를 없애버리는 건 쉽다. 불태우거나 갈아 엎어버리면 한순간에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초가 무성한 밭을 아름다운 화원(꽃밭)으로 만들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잡초 태우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화원 만들기 작업이다. 언제까지나 잡초 태우기, 독초 죽이기에만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안 된다. 그게 분명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엄연히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잡초가 그득하던 밭을 아름다운 화원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잡초 태우기도 사실은 의미가 없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들 자신이 먼저 아름다운 화원, 샬롬으로 가득 차있어야만 할 게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럴듯한 미명하에 단순히 잡초 뽑기, 독초 죽이는 살충제 역할밖에 안될 것이다. 평생 그런 일에 눈알 벌개지고 땀을 뻘뻘 흘릴 순 없지 않나, 피 같은 땀, 생명 같은 시간인데 말이다.

  머잖아 예수님 이 땅에 오시면, 우리 모두 종아리 걷어 부치고 일렬횡대로 서서 참나무 회초리로 피멍이 들도록 두드려 맞지나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화원을 만들어야 하는데, 맨날 살충제만 팍팍 뿌려대며 잡초만 죽이고 앉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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