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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해와 달" 2007년 7월호에 김성 (경남 남해 당항교회) 목사님이 쓰신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고 아래에 옮깁니다.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글이었습니다. 덧붙인 파일 두개는 글의 처음 (Secret Sunshine-1.jpg) 과 중간 (Secret Sunshine-2.jpg) 에 있는 영화의 포스터입니다.
  출처는 "해와 달" 사이트 (http://www.hae-dal.com/mp.htm --> 왼쪽의 "쪽지 해와 달" 클릭 --> "2007년 7월호" 클릭) 입니다. 이곳에 가시면 관련된 글 몇 개를 더 보실 수 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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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허영과 탐욕의 잘못된 만남이 빚어낸 비극

김  성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제60회 칸느영화제에서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중략) 영화 내용은 단순하다.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살러 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새 삶을 시작하려던 주인공 신애에게 비극이 찾아든다. 어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유괴범은 돈을 노렸다. 범인은 다름 아닌 신애의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었다.

신애는 남편의 죽음에 이은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온몸이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통곡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약국을 하는 이웃의 권유로 어느 교회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녀는 여기서 목 놓아 처절하게 운다. 신(神)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인간의 가장 처절한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의 통곡일 것이다. 통곡 중이던 신애의 머리위에 목사의 손이 얹어지고 신애의 통곡은 잦아든다.

그리고 갑자기 신애가 변했다. 그녀가 갑자기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어느 날의 가정예배에서,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음을 고백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되었다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그녀는 매주 열심히 교회를 출석할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찬양하며 노방전도에까지 나서게 된다.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변화를 받았고 열심을 가진 신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목사와 교인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를 칭찬하고, 신애는 교도소 면회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범인과 마주 앉는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인 당신을 용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신애의 입을 통해 하나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며,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그리고 다시 신애는 변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와서 앉아 있어도 나는 못하겠다는 식으로 우두커니 앉아있는다. 교회에 들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미친 사람처럼 두 손으로 의자를 두들겨댄다. 자신을 위한 기도모임을 하는 교우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버린다. 레코드가게에서 음반을 훔치고 그 훔친 음반으로 교회의 야외집회를 조롱하며 훼방한다. 그리고 자신을 전도했던 약사의 남편 교회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情事)를 가지려고 한다.

신애는 확실히 다시 변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팔을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하고, 미수에 그쳐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이면 미용사가,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의 딸이다. 신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미장원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집 마당에 앉아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 스스로 머리를 싹둑 싹둑 자른다.

영화는 그렇게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집 마당을 비추며 끝이 난다. 고장 난 차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을 비춤으로써 시작했던 영화는 신애의 집 지저분한 마당을 비춤으로써 끝이 난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은 종교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을 말하는 영화라고 했다. 아마 감독의 이 말 속에는 불필요한 종교적 논쟁에 휘말리거나 특정종교 세력의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구원>과 <용서>를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이때 종교적이라는 말은, 특정종교를 포교하거나 혹은 반대하기 위해서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영역의 문제, 즉 구원과 용서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영화가 「참된 용서와 구원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을 묻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신애도 범인도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신애는 고통으로부터, 범인은 죄책감으로부터! 두 사람 다 용서를 말한다. 신애는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말하고, 범인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영화는 비극이다. 왜 그럴까? <밀양>은 바로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虛像)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허상이 아닌, 참된 구원과 용서가 무엇이냐를 묻고 있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허영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虛榮)이다. 신애의 돈을 노린 웅변학원 원장은 어느 술자리에서 신애가 좋은 땅을 사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 보다는 목 좋은 땅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신애의 말을 듣고 범인은 신애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신애는 이곳저곳 땅을 소개 받아 둘러보러 다닌다.

하지만 사실 신애는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신애는 유괴범과의 통화에서 자신에게는 사실 땅을 살만한 돈이 없음을 고백하며 요구하는 돈을 마련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쩔쩔맨다. 단지 돈 많은 사람으로 보여야 새로운 터전에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생각에 신애는 그런 허세를 떨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신앙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난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어쩌면 거기에는 원수조차 용서하는 믿음을 가진 자신을 스스로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그런 믿음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의 용서 앞에서 참회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범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차라리 범인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면 됐지 굳이 면회를 가서 범인 면전에 대고 용서한다고 말할 것까지야 뭐냐고 말하는 종찬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깝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용서의 세계를 굳이 눈에 보여주고자 했던 신애의 마음에는, 분명 영적인 자만감과 범인에 대한 영적인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평안을 주셨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말해주러 왔다”는 신애의 말 속에서 그것을 읽을 수가 있다.

문제는, 신애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바, 신애는 범인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용서 앞에 감격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범인이 오히려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지극한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신애는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니…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신애의 이 말은 그녀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증거며, 그러기에 그녀의 용서 퍼포먼스가 실은 영적인 허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신애는 마치 하나님께 시위라도 하듯 자신이 나가는 교회의 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情事)를 벌이고자 한다. 그 때 신애는 자신의 몸을 거칠게 더듬는 장로 밑에 깔려 하늘을 쳐다보며 비웃듯이 말한다.

“보여? 잘 보이냐고?”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물론 신(神)을 조롱하며 하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신애에게 신의 거처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하늘이다. 그래서 벌건 대낮에 장로를 유혹해 보란 듯이 하나님 면전에서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녀가 보았다고 고백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란 무엇일까? 그녀는 한순간도 눈에 보이는 세계를 떠나본 것 같지 않다. 그녀는 끝내 참된 용서를 하지 못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의 딸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미장원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신애가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처 할 수 없었던 용서! 진정 신(神)이 주시는 마음을 가지기 전에는 섣불리 할 수 없었던 용서를,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은 그녀의 허영에 불과했다. 그 영적인 허영이 그녀에게 또 다른 파탄을 불러왔다. 종찬의 말대로 그냥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통해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어느 날 진정으로 범인을 용서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두 가지 탐욕

신애의 허영과 함께 이 영화를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웅변학원 원장의 탐욕이다. 그는 돈이 탐나 자신의 학원을 다니던 어린아이를 유괴해 죽였다. 물질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죄를 지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탐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를 재차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은 범인의 두 번째 탐욕이다. 바로 영적인 탐욕이다.

신애는 범인의 자기 구원과 용서의 선포 앞에서 기절했다. 도대체 사람을 죽여 놓고 저렇게도 평안하게 뻔뻔하게 자기 구원을 말해도 되는 것인가? 피해자는 피를 쥐어짜는 통곡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정작 가해자인 범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노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신애가 차를 운전하다가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칠 뻔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부부인 듯이 보이는 두 남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신애에게 이렇게 따진다.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사과하는 사람에게 하는 대꾸치고는 다소 매몰차 보이는 이 대사가 나는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키가 된다고 본다.

그렇다.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다가 아니다. 죽인 죄에 대해서는 설사 용서를 받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죽임을 당한 피해자에 대해서 어떻게 면죄(免罪)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최소한 피해자 앞에서만큼은 가해자는 영원한 참회(懺悔)의 자리에 남아야 하는 것이 진정 용서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

영화 속 범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신애 앞에서 참회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너무도 떳떳하게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선언한다. 신애는 그의 모습에서, 최소한의 죄의식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빌미로 내어버리고, 사랑과 평안 운운하는 뻔뻔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 뻔뻔함 앞에 신애는 치를 떨었고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범인의 이 모습 속에, 이른바 값싼 은혜를 탐하는 또 다른 탐욕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해 뼈를 깎으며 참회하고 최소한 피해자 앞에서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서둘러 신(神)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고, 그 댓가로 참회의 눈물 대신 마음의 평안을 구가하는 것은, 분명 신의 은총을 이용하는 것이다. 죄인 스스로가 신에게 죄 사함 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신애의 말이 그 점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데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영화 <밀양>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신앙적 질문을 던진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신(神)은 언제나 가해자인 죄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시는가? 죄를 지은 죄인이 죄를 용서받아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신의 은총이라면, 그 죄의 피해자, 즉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범인은 감옥에서 예수 믿고 신(神)으로부터 죄 사함 받아 살인죄를 용서받고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시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 손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아이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으며, 어린 자식을 잃고 피를 토해내는 고통에 빠져 있는 아이 엄마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는가?

죄인은 값싼 은혜 덕에 최소한의 죄책감마저도 안고 살지 않는 동안, 그 죄인의 손에 죽어가거나 희생을 당한 가련한 영혼들의 구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가해자만의 구원이 과연 신의 은총이랄 수 있을까?

나는 영화 <밀양>이 기독교에 대해 던지는 중요한 신앙적 물음이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죄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사죄(赦罪)의 은총, 신의 사랑과 용서… 분명히 죄인에게 복음이다. 그러나 죄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죄인은 가해자다. 가해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피해자가 있다. 죄의 피해자를 배제한 채, 오로지 가해자로서의 죄인과 그의 죄 용서만을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극단적 이기주의를 낳는다.

죄인이 자신의 죄만 하나님께 용서 받으면 다인가? 가해자인 죄인이 신의 은총으로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을 때 희생자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그 영혼은 어떻게 구원 받는가? 피해자는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나? 피해자의 구원 없이 가해자의 구원만을 노래하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인가?

참된 사죄란, 신의 은총으로 그저 자신의 죄만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피해자 앞에서는 영원히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참회하며, 피해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Andrew Sung Park이라는 젊은 신학자는 그의 책 <The Wounded Heart of God>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통해 보건데, 교회는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인간 죄악의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요소, 즉, 인간의 죄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에 대해 간과해왔다.”

죄와 죄인의 구원을 노래하는 복음의 그늘진 곳에 그 죄의 결과로 희생당한 피해자의 영혼은 통곡하고 있다. 고통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영화속 신애처럼.

영화 <밀양>은, 피해자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않는, 가해자 죄인만을 구원하는 값싼 속죄의 은총이 아니라, 죄의 희생자의 영혼까지도 구원하는 진정한 신의 은총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속죄나 용서와 같이 인간의 탐욕과 허영 가운데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한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다. 신의 진정한 은총의 햇살은 비밀히 감추어진 Secret Sunshine(밀양/密陽), 비밀의 햇살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 Secret Sunshine이 무엇인지를 암시해 준다. 가위로 제 머리를 스스로 자르는 신애의 집 마당 땅바닥을 비추면서 영화는 끝나는데, 여기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지저분한 땅바닥이 아니라 그 땅바닥을 비추는 햇살이다.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흙탕물이 고여 있는 지저분한 땅바닥, 그것은 바로 탐욕과 죄로 얼룩진 인간의 추한 삶의 현장이자 살아가는 모습이다. 숭고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지만 더럽고 추한 속물의 땟국물이 흐르는 인간들의 삶, 그리고 인간의 삶의 자리(집), 바로 거기에 한줌 따스한 햇살이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신애가 찾던 신(神)의 은총의 햇살이 그녀가 끊임없이 올려다보고 눈을 흘겼던 청명한 하늘위에 머물지 않고, 상처와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삶 가운데 이미 찾아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구원과 은총을 바라며 하늘만 올려다보던 신애에게 사실은 그녀의 삶 안마당에 신의 은총의 햇살이 이미 임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비밀스런 은총의 햇살이 바로 종찬이다!


신애에게 찾아온 비밀스런 햇살-종찬

영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종찬은 신애를 줄기차게 돕는 자로 나온다.

카센터 사장인 종찬은 영화 첫 장면에서 고장 난 신애의 차를 고쳐주기 위해 신애 앞에 나타난다. 그 인연으로 신애가 피아노학원을 차리는 것을 도와주고 가짜 상장까지 만들어 학원에 걸어주며 신애가 밀양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땅을 사겠다는 신애와 함께 땅을 보러 다니기도 하고, 화장장에서 신애의 가족조차 신애에게 욕을 퍼붓고 떠나가도 마지막까지 남아 신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은 종찬이다.

신애가 낯설기만 한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도 종찬은 신애와 함께 교회를 찾았고, 신애가 범인을 면회 갈 때도, 그리고 범인과 마주 앉았을 때에도, 범인을 면회한 후 충격으로 기절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종찬은 늘 신애를 돕는 자로 신애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신애가 자살미수 후 병원에서 퇴원할 때도 종찬은 신애의 새 옷과 꽃다발을 사가지고 신애를 찾아왔다. 신애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머리부터 자르고 싶다고 했을 때 종찬은 신애를 미장원으로 데려갔고, 머리를 자르는 신애 뒤에 앉아서 신애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 미장원을 뛰쳐나와 집 마당에서 제 머리를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는 신애를 위해서 종찬이 거울을 들어준다. 머리를 자르는 신애를 위해 종찬이 거울을 들어주는 마지막 장면은 신애가 아픔을 딛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을 종찬이 돕는 것을 보여준다.

종찬은 이렇게 영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한결같이 신애를 돕는 자로 나온다. 고장 난 신애의 자동차처럼 고장 난 신애 인생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늘 신애를 지켜보며 신애를 돕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정작 신애는 종찬을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신애는 종찬더러 “사장님 같은 분을 속물이라고 한다”고 말한다.

세상감투 같은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커피 한잔 시켜놓고 다방아가씨의 팬티를 화제 삼아 키득대는 종찬은 신애가 보기에 분명 속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기에 종찬의 호의와 도움이 신애에게는 고맙기보다는 그저 귀찮고 자신에게 딴 맘 먹은 속물의 추근거림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신애에게 종찬은 영화 마지막 장면의 지저분한 마당 땅바닥처럼 그저 추한 세상 속물일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속물이 신애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신애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 애를 쓴다. 신애의 삶에서 고통의 그늘을 걷어 내고 화창한 햇살 한 줌 안겨주기 위해 안절부절 한다.

신애는 신의 은총을 찾아 자꾸 하늘만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신의 은총의 햇살은 그녀가 지저분하게 여기는 속물 종찬을 통해 그녀의 삶 한가운데 와 있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 신애의 집 더러운 마당 한 구석을 비추는 한 줌 햇살이 말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애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줄 신(神)의 은총의 햇살은, 그녀의 집 마당 지저분한 땅을 비추고 있는 햇살처럼, 이미 그녀의 삶 한가운데 찾아와 그녀를 비추고 있다. 신(神)은 언제나 그렇게 비밀스럽게(!) 이미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찾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신애 스스로가 속되게 여기는 종찬을 통해서 신(神)은 그녀에게 끊임없는 위로와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포스터를 보자!







고통으로 넋이 나간 듯이 보이는 신애 뒤에 태양인 듯이 보이는 환한 광명이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태양과 신애 사이에 한 발자국쯤 떨어져 종찬이 서 있다. 태양과 신애 사이에 종찬이 서있다! 그리고 이런 문구가 씌어 있다.

『비밀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다는 말일까?

Secret Sunshine(밀양/密陽), 비밀스런 햇살! 고통으로 그늘진 신애의 삶을 비춰줄 따뜻한 신(神)의 은총의 햇살! 바로 그 은총의 햇살이 신애에게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 아니 신애뿐 아니라 고통 가운데 신(神)의 은총을 구하는 인간들 모두에게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 대체 그 비밀이 뭘까?

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신애에게 비밀스럽게 찾아온 신(神)의 은총의 햇살이 바로 종찬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신애가 보지 못한 것은 종찬의 사랑 속에 담겨진 신(神)의 은총과 사랑이다. 고통 속에 울고 있는 그녀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신애를 돕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고, 속물이라고 욕을 먹어도, 귀찮게 하지 말라고 면박을 당해도, 그저 멋쩍은 웃음 한 번 짓고 여전히 그녀를 돕기 위해 애쓰는 종찬의 모습 속에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해도 여전히 인간에게 따뜻한 햇살 한줌 비추어주고 싶어 하시는 신(神)의 사랑을 본다.

신(神)은 고통당하는 인간을 돕는 자 중에 계신다. 영화가 말하는 비밀한 사랑! 그것은 바로 고통당하는 인간과 그를 돕는 자 중에 비밀히 찾아와, 고통당하는 인간을 위로하고 손을 잡아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하는, 신(神)의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사랑인 것이다.

신(神)은 언제나 인간을 비밀리에 찾아와 비밀스런 사랑과 은총의 햇살을 비추어주는 것이다. 사랑이란 원래 비밀스러운 것 아닌가? ♣

                               목사/경남 남해 당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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